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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틴데일 (1494? - 1536)의 생애
DMKim08-14 05:19 | HIT : 5,343 | VOTE : 351
2014년 8월 23일에 가정교회 리더들과 함께 William Tyndale Silo교회를 방문합니다. 아래의 글은 틴데일이라는 인물의 탄생배경을 간략하게 기술한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일생을 성경번역에 바치게 되었고, 그의 죽음, 그의 사역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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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 경에 태어나 불혹의 나이를 시작할 즈음 말하자면 1536년 에 최고형인 교수형을 당했고, 참수당했고, 화형까지 당한다. 그의 재는 세느강에 뿌려졌다. 죽기 직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아마도 이것이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382년, 겐트 (Gent) 사람들에게 끔찍한 해였다. 겐트의 지도자 필립스 (Filips)가 로오더뵈이크 (Lodewijk) 2세에게 반역하다가 전사한다. 1382년은 요한 위클리프 (John Wycliff: 1325-1384)에게도 끔찍한 해였다. 그는 영국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그가 옥스포드에서 교수로 지내고 있을 때, 파문당한 해이다.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 (롤라드파)는 로마교와 교황에게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위클리프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의 일생이 윌리암 틴데일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1380년에 제롬이 쓴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평신도’에게 성경을 읽히고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로마카톨릭은 이에 반대했고, 그에게 사형언도를 내렸지만, 그는 간신히 이를 모면하였다.
1430년 롤라드파 (위클리프 추종자)에게 (영국에서 첫) 화형 언도가 내려졌다.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롤라드파들은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이후에 위클리프와 롤라드파의 사상이 얀 후스에게 전달되었다. 얀 후스는 1415년에 콘스탄스 공회에서 화형선고를 받고 순교했다.
이 롤라드파가 14세기 초엽부터 이미 플랑드런 지역과 Henegouwen 지역 (현재 벨기에 북서부)에 있었다. 이 롤라드파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 교황은 ‘세속적 일’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 교회가 너무 세속화되었다.
- 수도원들이 기본적인 영적인 문제들을 무시한다.
- 누구든지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로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 자기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나쁘다.
- 우리는 서로 형제이다.

이 롤라드파는 처음에는 교회를 개혁하려는 무리들에 불과했지만 귀족들과 카톨릭 교회의 눈에는 신경이 거슬리는 집단들이었다. 요즘말로 하자면 이들의 행위는 다분히 사회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로 보였는데, 그러면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주후1300년대부터 무역이 활발했다. 이는 주로 육로와 수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무역이 활발한 곳에 ‘새로운 사상 (프로테스탄트)’도 함께 수입되기 마련이다. ‘새로운 사상’이 급속도로 온 지역으로 퍼지게 한 동인에 요한 구텐베르그의 인쇄술도 한 몫을 한다. 말하자면, 그의 인쇄술은 그 당시의 인터넷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런 시대적 배경속에 윌리암 틴데일이 아주 비옥한 농경지대이며 직물생산지인 Gloucestershire (영국과 웨일즈 경계)에서 태어난다. 우연이든 아니든, 그 지역은 또한 롤라드파에게는 홈그라운드이었다. 이 하층계급들이 직물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국에서 직물 무역과 롤라드 사상은 서로 엉켜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직물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직물 뿐 아니라 이 롤라드 사상을 시장에서 혹은 해외로 함께 ‘수출’했다. 그런식으로 이들의 ‘상품 (직물과 롤라드 사상)’이 안트베르펜 (Antwerpen: 영어로는 안트워프, Antwerp라고 부름)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틴데일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장미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워기에 농경지를 얻게 되었다. 틴데일은 학교에 다니면서 라틴어를 배웠는데, 그는 모국어와 함께 라틴어, 헬라어, 독일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언어천재였다.
틴데일은 그 당시의 학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옥스포드에 있는 학생들이 석사를 마친 이후에야 신학공부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왜냐하면 석사 공부 때 주입식 교육 – 그는 ‘세뇌교육’이라 표현함 - 을 받기 때문이다. 사견은 금물이고 주교가 가르치는 것을 따라야 하는 방식이었다. 학교에서 모든 책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고, 수업 시간에도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1506년 12살이 되었을 때 옥스포드에서 공부했고, 그가 1517년에서 1521년 동안 캠브릿지에 머물면서 아마도 독일 종교개혁자 루터의 저작들을 접했다.
틴데일은 캠브릿지에 있다가 다시 고향 Gloucestershire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사제가 되었고 설교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신약 전체를 가르쳤는데,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을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주변 상황이 틴데일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옥스포드와 캠브릿지에서 왔으며 고전어에 대한 지식이 탄탄한 이 청년의 가르침, 그러면서도 하층계급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그의 방식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당시 기득권자들 (특히 그 지역의 대주교)의 인기는 추락하고 있었다. 이제 틴데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될 시점이 되었다!
우선 틴데일은 법정에 서야 했고, ‘이상한 가르침’을 중지해야 했다. 사방에서 여러 경고가 있었지만 그 와중에 틴데일이 깨달은 것이 있다. 그 당시 사제들이 라틴어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라틴어를 사용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는 성경번역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압박, 그리고 성경번역을 하기엔 너무나 척박한 환경 때문에 결국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 당시 큰 항구도시는 독일의 함부르크, 쾰른 그리고 벨기에의 안트워프 였는데, 그곳에는 인쇄술도 한창이었다. 틴데일은 쾰른에서 인쇄업에 종사하면서 신약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인쇄업자들 중 스파이가 있었고, 이단심문관은 늘 주변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보름스 (Worms)로 피신했다. 그 사이 상당한 양의 영어성경 번역본이 영국으로 밀수되었다.
1526년에 보름스에서 그는 신약 전체를 번역 출판한다. 약 7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었는데, 그 당시 3천 부 (혹자는 6천부)가 인쇄되었는데 지금은 단 2개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자 영국 카톨릭 교회의 신경이 곤두 서기 시작했다. 틴데일이 출판한 책들이 수출품들 사이에 숨겨진 채 영국으로 밀수되니까, 카톨릭 교회는 이 틴데일이 출판한 책들을 압수하기 시작했고 불태웠다.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고 화형을 당하게 된다.
그 사이 틴데일은 안트워프에 왔고 1530년 초에 창세기를 번역 출판한다. 틴데일이 안트워프에 오는 것은 당연하다. 안트워프에 영국 사람들의 중요한 상업기지였다. 거기에는 또한 인쇄소가 많았다. 1500년대 에는 60개의 인쇄소가 있었다. 안트워프는 그 당시 상당히 관용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에 ‘새로운 사상 (프로테스탄트)’을 전파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래로 라틴 아메리카의 생산품들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캐시플로 (cash flow)가 틴데일이 머물던 안트워프를 걸쳐 북유럽까지 도달했다.
틴데일은 안트워프에서 “The practice of Prelates (대 주교들의 실태)”라는 책을 쓰면서 헨드릭 8세와 교황이 되고자 애를 썼던 Wolsey의 계획에 대항했으며 헨드릭에 동의하려는 대학들에게도 대항했다. 1529년에는 틴데일이 “The Obedience of a Christian Man (기독인의 순종)”이라는 책을 썼다. 비록 그때 틴데일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헨드릭 8세는 바로 이 책에 감명을 받았다. 그 책의 주 내용은 이렇다. 교회는 세속권력 위에 군림하여서는 안되고 복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헨드릭의 구미를 당겼다. 그래서 헨드릭은 틴데일과 접촉하려 했고 서로가 자기의 목표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인물이라 여겼다. 그래서 틴데일을 영국으로 초청하려 했지만 틴데일은 이러한 헨드릭의 의도를 무마시키려는 세력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갈 수가 없었다. 1534년에 이르러서는 틴데일은 신약성경 번역의 개정을 시작했고 동시에 구약번역에도 착수했다.
브뤼셀에서는 헨드릭 8세와 영국에 대한 반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카타리나 (캐서린) 의 조카 카렐 5세가 헨드릭 8세에게 더더욱 적대적이었다. 물론 안트워프는 아까 언급한 대로 모든 것에 관용적이었다. 영국 상인들과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안트워프에 있는 영국 타운에 머물면 안전했다. 누구도 이곳으로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그때 루벤 (Leuven)에 헨리 필립스 (Henry Phillips)가 등장한다. 루벤이라는 도시는 종교개혁의 흐름에 반대하는 데에 앞장서는 도시로 유명하다. 누가 이 작자를 보냈는지는 불확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분명하다. 틴데일과 접촉하여 친해진 다음 배신하고 이단심문관에게 넘기는 것이다. 그렇게 목표를 이루면 그에게 보상이 있었다.
필립스는 처음에는 상인들 속에 섞여 배를 타고 안트워프로 건너온다. 틴데일이 자기 동족 상인들과 자주 접촉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식으로 두 사람은 서로 만나게 된다. 틴데일은 필립스를 의심없이 신뢰하게 되고 영국 타운으로 그를 받아들이게 되고, 거기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이 작자에게 다 보여준다. 결국 얼마 후 필립스는 계획대로 틴데일을 배신하고 미리 준비시킨 군인들에게 체포를 명령한다. 체포당할 때, 틴데일의 모든 작업들도 다 압수당한다. 틴데일은 Vilvoorde의 성에 갇히게 된다.
영국 국왕 및 여러 사람들이 틴데일을 빼내려고 시도했지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제 열 일곱의 이단심문관들 (그 가운데 둘은 루벤 출신이다!) 앞에 틴데일은 서야 했다. 틴데일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수확인 것은 틀림 없다.
1535년 9월에 틴데일은 Bergen-op-Zoom의 간수장에게 편지를 써서 따뜻한 옷, 램프, 히브리어 성경, 그리고 문법책 등을 전달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 편지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육필이다.
1536년에 틴데일은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정되받게 되고 사제직에서 박탈당하고 화형을 선고 받는다. 16개월의 감옥생활을 끝으로 그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가 42세였다.
그렇다면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한 말 -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 은 실현되었는가?
1535년에 Miles Coverdale 는 성경책을 인쇄하였다. 그는 틴데일이 함부르크에 있을 때 도와주었고, 캠브릿지에서도 공부했다. 그는 틴데일의 번역을 사용하여 성경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이 헨드릭 8세로부터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537년에 헨드릭 8세는 John Rogers가 만든 “Matthews Bible”의 출판을 허용했다. 이 성경책의 90퍼센트는 거의 틴데일의 것이다. 1540년에 “Great bible”이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Coverdale의 것이다. 이번에는 헨드릭 8세가 인정해 주었다. 그 결과 영국의 모든 교회들이 이 성경책을 읽도록 했다. 그 이후에 우리는 소위 흠정역 (King James Version - 제임스 1세가 영국국교회에 예배를 위한 표준성경을 번역하라는 명령에 따라 1604년에 번역 착수하여 1611년에 완성됨.) 을 가지게 된다. 흠정역은 틴데일 번역으로부터 70-80퍼센트나 차용한다. 이 정도면 영국왕의 눈이 열렸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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