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Korean Church of Brussels! 브뤼셀 한인교회

 
 
 
 















사도행전 6:1-7의 '일곱 사람'의 정체
DMKim01-06 19:14 | HIT : 6,770 | VOTE : 309
2014년 1월 4일 토요일에 가졌던 제직 세미나때 집사직에 대해 살폈습니다. 행 6:1-7이 집사직의 직접적인 기원은 아니지만, 집사직에 대해 주는 지혜와 교훈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래의 글은 네덜란드 Kampen 신학교 (해방파, 31조파)의 신약학 은퇴교수 Jacob van Bruggen 교수의 Ambten in de Apostolische kerk (사도적 교회에서의 직분들)의 책의 65-77페이지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한 것입니다.

일곱 사람의 정체?

사실 행 6장은 혹자가 알고 싶어하는 그런 직분의 기원에 대하여 알려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질문과 관심을 잠시 내려놓고, 본문 안에 있는 특수한 상황들을 우선 볼 수 있어야 한다. 행 2장-5장을 읽으면 그 당시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예루살렘 교회에 어려움이 발생하는데,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오순절 날에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이 교회는 결집력이 강하며, 하나로 단단히 뭉친 교회이며, 외부적으로는 억압이 있고,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현상들이 있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행 6:1은 기록한다. “그때에 (그 당시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순간에 이런 성장을 저해하는 불만의 요소가 발생한다. 그런데 행 6:7은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1절이나, 7절이나 똑같은 용어 “많아졌다”를 사용하고, 그로 인해 하나의 본문의 단위를 형성한다.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일곱 사람이 등장한다.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불만 때문에 이 일곱이 선택되지만, 또한 이들은 그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선택되었다. 사도들이 이들을 선택하여 안수하기까지의 그 과정들을 살필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본문에서 ‘헬라파’라고 할 때, 유대인들 가운데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과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들, 말하자면, 두 그룹이 있었다. 지금 초대 교회에 나타나는 문제는 이 두 그룹들 간의 마찰이 아니다. 사도들은 두 그룹의 마찰을 줄이고, 평화를 도모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았다. 사도들은 도리어 교회의 unity를 위해 애를 썼다. 이 연합 (unity)이 원치 않는 부주의 (매일의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사도들은 직시했다. 이 부주의는 그야말로 두 그룹 간에 존재하는 언어차이의 문제 때문이며, 이런 사태는 의도되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들의 해결책은 이 두 구룹을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었다), 교회에서의 매일의 구제책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개선책을 마련하도록 일곱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개선되어야 했는가? 그것은 바로 ‘매일의 구제’제도였다. 여기 사용된 구제라는 단어 (디아코니아, diakonia)는 폭 넓게 사용된다. 예를 들면 행 6:4에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서, 사역이라는 말은 ‘diakonia’이다. 영어에 ‘deacon’이 헬라어 diakonia에서 왔고, 우리에게는 집사라는 단어로 정착되었다. 오늘날 집사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직책을 주로 담당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헬라어 ‘diakonia’는 구제라는 의미보다 훨씬 폭 넓게 사용되었다.

행 6:1-7의 문맥에서 과연 일곱사람들이 선출된 이유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 위함이었을까? 일단 본문에서 가난한 자들의 구제에 대한 언급은 없고, ‘매일의 구제’에 대한 언급은 있다. 그 당시 과부들이 가난했다는 것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데 과부에 대한 언급은 있고, 남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눈에 띈다.

행 2:45, 4:35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데, 과부들이 따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그 누구도 결핍이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런데 행 6:1에 와서 과부들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발견한다. 6장에 와서야 가난 때문에 이 과부들이 불만을 제기했다라고 가정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행 6:1은 이런 불만이 갑자기 제기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쌓여온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결핍이 없었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과부들에게서 어떤 불만이 제기되는 상황이 왜 발생하는지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이 헬라파 과부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에 몸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질문이 의미있는 이유는 바로 그 매일의 구제라는 것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과연 ‘매일의 사역 (diakonia)’인가? 아니면 ‘매일의 구제지원 (relief)’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2절이 결정적인 단서를 준다고 여긴다. 우리 말로 ‘접대’라고 되어 있는데 본래 의미는 ‘식탁 봉사’ 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식탁을 매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가난한 자들을 식탁에서 도왔던 이러한 유대적 관습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오 같이 2절만을 따로 떼어내지 말아야 한다. 2절의 접대 (식탁 봉사)를 이해하려 할 때 조차 1절의 ‘매일의 diakonia’와 연결시켜야 한다.

사실 1절의 ‘매일의 diakonia’를 이해하려고 할 때, 본문단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겠는가? 행 6:1 이전에 diakonia를 발견할 수 없지만, ‘매일’이라는 표현은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행 2:46에, “성전에서 매일 모였고”, “매일 떡을 뗏다”. ‘매일’ 이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지만, 비슷한 패턴을 우리는 행 5:42에서 본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이들은 이렇게 날마다 성전이든, 집에서든, 모일 때 서로 식탁을 함께 했기 때문에 이들의 매일의 모임 가운데 ‘섬기는 일’이 많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또한 물건들도 서로 통용하는 것도 이런 매일의 모임에서 나타났다 (행 2:45).

그러므로 ‘매일’이라고 할 때, 이것은 이와 같은 매일의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함이 유력하다.
그런 맥락에서 6:1에서 ‘매일의 diakonia’가 나온다. 따라서 행 6:1의 매일의 diakonia를 방금 위에서 설명한대로 성도들의 (집에서) 매일의 모이는 것과 그때마다 요구되는 섬기는 일과 연관시킬 때, 2절의 접대 (식탁 봉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물론 이와 같은 식탁 교제를 할 때, 돈이 없는 성도, 음식이 없는 성도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있었을 것은 부인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매일의 diakonia’를 전적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로만 제한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매일의 diakonia’는 구제의 의미를 넘어서서, 오히려 전 회중이 함께 모임을 가지려 할 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사역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과부’에 대한 표현이 반드시 가난한 자에만 한정될 필요가 없다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행 2장-5장을 주의깊게 읽어볼 때, 특정한 가난한 계층 (말하자면 헬라파 과부)이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행 6장 이후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주목한다면, 행 6장의 상황에 대해 오히려 다른 해석이 더 유력함을 알게 된다.

행 9:39절과 41절에 보면 다시 (욥바라는 곳) 과부들이 등장한다. 특히 9:41에 보면, “성도들과 과부들”이란 표현이 나타난다. 여기서 과부라는 표현과 가난이라는 표현을 자동적으로 연결시킬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도 교회 안에 특정한 그룹들이 존재할 수 있듯이, 과부 역시 그와 같이 특정한 그룹이기는 하다. 행 9:39에 의하면 (도르가가 그 과부들과 함께 있을 때에 만든 옷들…) 도르가 역시 과부의 그룹에 속했고, 그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 (diakonia)를 심히 많이 했다 (행 9:36). 굳이 딤전 5:1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과부라는 언급을 늘 가난한 자와 연결시킬 필요가 없고 때로는 과부들 조차도 교회 안에서 도움을 주는 자들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살펴야 할 표현은 그 과부들이 매일의 diakonia에서 “빠지므로 (간과되므로)”란 표현이다. 만일 식탁봉사 (2절의 접대)라는 영역에서 이 표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당시 가난한 자들에게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어 주는데, 헬라파 과부들이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헬라파 과부측에서의 원망이 발생했을까?

방금 위에서도 살핀대로, 사실 행 6장 이후의 기록들을 읽으면, 이런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일단은 ‘가난’, ‘구제’라는 개념을 잠시 제쳐두자. ‘매일의 diakonia’, 그리고 반드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매일의 모임과 그에 또한 수반되는 메일의 식사가 있다고 할 때, 이런 상황에서 ‘빠지므로 (간과되므로)”라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그것은 바로 매일의 순번을 정해가면서 수행하는 봉사 및 섬김이며, 여기에 과부들이 역시 가담했다. 헬라파 과부들이 자신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지 않거나 구제대상에서 제외시켜버리는 것 때문에 원망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봉사당번에서 자신들의 명단을 기재하지 않아서 봉사할 기회를 놓치는 것에 대한 원망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헬라파 과부들은 식탁에서 음식을 덜 제공받았기 때문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들은 그 ‘매일의 diakonia’에 있어서 봉사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오늘날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여전도회에서 당번을 정할 때, 일단은 아는 사람, 그리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 그런식으로 (결코 의도적인 것과 상관 없이) 사람들을 뽑아서 정할 수 있다. 이때 자기가 순번에 들어가지 않아서 속상한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다.

만일 헬라파 과부들이 식탁에서 음식을 제공 받지 않는 것 (구제대상에서 제외되는 것) 때문에 원망했다면,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이 점을 알리지 않고, 또한 음식을 균등하게 분배해야 할 책임자들을 책망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헬라파 과부들의 원망이 후자의 이유에 놓여 있다면 (봉사 당번에서 명단이 누락된 것), 지금 발생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음식 제대로 분배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모임을 운영하고 조직하는 것의 문제와 관련 있게 된다. 물론 여기서의 ‘매일의 diakonia’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것이 가난한 자의 구제문제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훨씬 폭 넓다. 만일 사도들이 이런 일들에 계속 매인다면, 저들은 말씀과 기도의 diakonia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6:2). 여기서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매일의 diakonia를 포함하는 전체 모임을 관장할 사람들을 지명하는 것이다. 래서 이 일곱인이 선출되었다. 물론 이 일곱인이 그 당시의 수천명의 성도들을 직접 대하면서 섬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6:3에, “이 일을” 그들에게 맡겼다고 기록한다. “이 일”이란 표현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epi)는 이 일을 관장한다는 의미를 있다.

이 일곱 사람을 선택할 때 기준을 보면, 사실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는 것에 대한 암시는 없다.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기로 했다. 그러나 집집마다 성도들이 모임을 가질 때 필요한 영적인 리더쉽은 이 일곱인들에게 넘겨졌다. 이 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과 지혜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 이 성령으로 충만한 자만이 그 회중을 인도할 수 있다. 회중들의 모임이 있을 때, 그 곳에는 특별히 지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들이 헬라파 과부들을 베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지혜의 결핍이었던 것이다. 인간적인 지혜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회중을 영적으로 인도하려면 인도자는 모임을 가능케 하시는 그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사실 사도행전 6장에 있는 일곱사람들을 집사로 보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도행전 나머지 부분을 볼 때, 이 일곱인이 가난이라는 주제와 관계도 없고 오히려 설교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에 헌금을 보낼 때, 이 일곱인에게 오지 않고,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로 전달되었다 (11:30). 이 일곱인이 뽑힌 이후에 곧 바로 스데반이 등장하는데, 설교자로 등장하며, 성경에 호소하여 참 증인의 역할을 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빌립은 뒤에 읽어 보면 복음전도자로써 사마리아를 여행하다가 세례를 주고, 자신의 설교사역을 가에사랴까지 확장한다 (8:4-40). 스데반과 빌립의 이런 식의 사역을 가지고서 일곱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바로 ‘이 일’을 위해 선출된 이 일곱인들이지만, 그들은 또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행 21:8에 있는 표현 (일곱인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 – 집사란 표현은 원문에 없음)에서 볼 때, 복음전도자의 자격이 일곱인의 자격조건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일곱명이 복음전도자가 되도록 선출되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일곱인을 뽑을 때, 특수한 일을 위해 뽑았지만, 이들은 또한 복음전도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던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의 구제란 주제를 계속 염두에 두면 이 본문이 수수께끼이지만, 성도의 모임이 성립할 수 있도록 영적인 리더쉽을 발휘한다는 측면을 생각할 때, 일곱인의 선출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도행전 이후의 기록을 볼 때, 이 일곱인은 추가되거나 계승되지 않았다. 스데반이 죽었지만,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 유다가 죽었기 때문에 마띠아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7’의 숫자를 완성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후의 기록에서 만나는 직분은 장로들이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일곱인들과는 구별되는 직분임에는 틀림 없다. 어떤 선교지에서 생긴 교회가 직분자를 필요로 할 때, 그들은 다시 이 일곱인을 뽑지 않았다.

그 말은 이들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아주 독특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위치를 규명할 때, 사도행전의 본문 안에서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2장-5장과 사도행전 6:1을 비교했을 때, 우리는 이 초대교회안의 발생했던 대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 안에 불일치의 요소가 발견되었고, 이것이 교회의 하나됨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일곱인이 그 당시 교회에서 차지하던 위치를 고려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일곱인의 선출 이후에 나타나는 사건들도 유심히 봐야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스데반의 순교이며, 복음전도자인 빌립의 사역이다. 사실상 이 일곱명의 선택은 그 이후의 역사과 무관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식탁봉사와 연관된 사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하는 바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의도이다. 스데반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를 방대하게 기술하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핍박이 본격화 되었다. 이번에는 사도들을 향한 핍박이 아니다 (행 2-5장). 이제부터의 전략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사도들을 복음전파의 일로부터 분리시키고,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례받은 그 제자들을 사도들로부터 떼어놔야 한다. 이제 사도들이 핍박의 대상이 되기 보다, 이젠 그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제자들이 유다, 사마리아에 흩어지게 되었다. 사도들은 예외였다 (8:1).

여기서 우리는 폭발적 성장 (6:1)에서 흩어짐 (8:1)의 순서를 보며, 다시금 수많은 회중들이 탄생하는 것을 본다. 누가의 기록 의도에 의하면, 이런 과정이 바로 교회의 사실상의 기능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식간에 예루살렘에 많은 믿는 무리들이 모이게 하셨다. 그래서 그 땅, 그리고 그 주변이 저들의 영향력 아래 있게 하셨다. 즉, 이 예루살렘에 모인 허다한 무리들은 결국 흩어지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이 지명된 일곱인이 보고 있었다. 이 7 인은 스데반이 죽고나서 이젠 6 인이 되었지만, 핍박으로 인해 회중들이 흩어지게 될 때, 그들의 사역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회중들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빌립은 그런 방식으로 교회를 섬겼다. 이런 방식의 섬김의 결과는 이것이다. 본래 모교회였던 예루살렘의 회중들이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 전 지역에서 흩어져 평안을 간직할 수 있었고 (행 9:31) 계속 성장하며, 주님을 경외할 수 있었다. 9:31에서 다시 성장이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그 말은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는 이전의 패턴 (예루살렘에 믿는 자의 수가 더하더라…)을 계속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사도행전 9장에 와서는 6장에서 나타났던 문제 (헬라파 과부의 원망)가 재언급되지 않는다. 욥바에 있던 과부들이 ‘간과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부들은 교회의 선한 일에 깊이 관련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교회가 확고히 서 간다. 빌립, 그는 일곱인 중 한명인데, 그는 회중을 인도하는 본을 보였다 (행 8:40) 마침내 빌립은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지역교회를 향한 자신의 사역을 계속 이어간다. 그 이후 누가는 이 일곱인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는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 그리고 문제발생, 그리고 흩어짐, 그리고 다시 교회가 정착하며, 성장하는 이 일련의 이야기를 통해 말해주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복음이 온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것,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바로 이 일을 위해 쓰임받는 다는 것이었다.

스데반의 죽고, 박해가 끝난 다음 예루살렘의 상황은 바뀌었다. 본래 예루살렘에 모였던 허다한 무리들은 이제는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에 정착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우리는 이전에는 만나보지 못했던 ‘장로’의 무리들을 만난다. 그들이 누구며, 직무는 무엇인지는 따로 기술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장로들은 사도들과는 구분된 그런 직분자들로 나타난다. 이 장로들이 일곱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로들은 이 일곱인들의 사역을 계승하지도 않는다 (비교 21:8). 이 일곱인들이 구체적인 상황가운데 부여받은 직무를 이렇게 요약하여 정의할 수 있다.

교회의 불일치의 위협 가운데서 예루살렘 회중의 모임을 리더하는 것, 그리고 이 회중들이 유대, 사마리아, 및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상황 가운데서 이들을 리더하는 것.

이와 같이 이 일곱인은 예루살렘 교회의 독특한 상황가운데서 독특한 직무를 위임받은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 일곱인의 역할을 이후에 등장하는 교회의 직분자들의 역할과 직접적인 평행선을 긋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특히 집사직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한 작업이다. 사실 팔레스타인 바깥에 있던 교회들을 인도한 사람들은 장로들이었다. 이 일곱인의 무리는 집사회 보다는 차라리 장로회에 비견될 지 모르겠다 (딤전 4:14)

직무와 관련하여 볼 때, 이후에 사도들이 사라진 이후에 교회를 인도하는 직무는 사실 상 장로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아는 것도 유익하겠다.

이 일곱인의 직무를 이후에 나타나는 사역들 (장로, 집사 등)의 직무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행 6장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 점에서 분명히 교훈을 줄 것이 있다. 복음 선포하는 일과 회중을 인도하는 일이 각각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서 필요하다면 별도의 직분들이 세워질 수 있다. 이럴 때, 이렇게 따로 세우심을 입은 자들은 독립성과 책임성을 구비해야 한다. 즉 일곱인이 회중을 인도한 방식을 볼 때, 우리는 역시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사람을 뽑아야 함을 절감한다.

행 6장에서도 무리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들을 택하였고, 사도들은 그들에게 이 일을‘맡겼다’. 그러므로 이 뽑힌 일곱인은 사람들이 뽑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이상 하나님의 손이 지명한 사람들이다.

사도행전 6장이 우리에게 주는 원리는 중세 때 거의 소멸되었다. 직분의 역할이 변질되었다.종교개혁 때, 이 직분이 다시 재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행 6장이 주는 지혜가 다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이 직분의 위치를 회복시킬 때, 신약에 직분에 관한 가르침을 상세하게 다루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행 6장이 주는 또 다른 원리는 이것이다. 교회 안에 나타나는 불일치, 혹은 하나됨을 깨뜨리는 문제들은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회중을 갈라놓는 것으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종이나 자유자를 백인이나 흑인들을 갈라놓지 말아야 한다. 한 회중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통합,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지역교회의 직분자들의 직무이리라.

요약
행 6:1-7은 기록한다. 집집마다 매일의 모임과 그에 수반되는 매일의 사역들이 있는데, 여기서 매일의 구제당번의 목록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이 간과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이 문제가 극복될 수 있었던 것은 사도들이 이런 매일의 사역들을 관장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회중들이 선출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교회는 더 성장하게 되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 일곱인을 뽑는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 당시 교회에 제자들이 심히 많아지고, 핍박 때문에 예루살렘 바깥의 온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시는 즈음에, 이 회중들이 뽑은 이 일곱인을 어떻게 당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지에 대해 누가는 말해 준다.

이 일곱인의 무리는 그 이후의 교회 역사에서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 (하나님의 회중을 인도하며, 보호하는 일) 은 오늘날의 직분자들에게 여전히 암시하는 바가 있다. 이젠 사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의 교회들이 사역들 (가르침, 기도, 회중을 돌보는 일)을 분담할 때,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사역했던 그 이후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모습과 무조건적으로 비슷할 필요는 없다.

  추천하기   목록보기

NO S U B J E C T NAME DATE HIT   VOTE
235  회중주의 (D. Deddens)     DMKim 2015·08·11 4582 287
234  성경퀴즈대회 후기     DMKim 2015·02·02 4366 320
233  윌리암 틴데일 (1494? - 1536)의 생애     DMKim 2014·08·14 5107 318
232  교회 교육은 특정 교사의 몫이 아니라 회중 전체의 몫     DMKim 2014·01·14 2980 271
231  수요일 저녁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시작하면서     DMKim 2014·01·14 3136 285
 사도행전 6:1-7의 '일곱 사람'의 정체     DMKim 2014·01·06 6770 309
229  Walter Claeys 의 누님 Chris Claeys의 장례식 후기     DMKim 2013·08·05 3604 346
228  2013년 8월 4일 주일 설교와 관련된 보충자료.     DMKim 2013·08·04 3108 285
227  노아의 아들들의 서열의 문제     DMKim 2013·04·08 9000 309
226  한민족 재외동포 세계선교의 비전 Kingdom Diaspora Vision     Y.J. Choi 2011·08·05 4293 386
225  디아스포라 선교 Diaspora Mission     Y.J. Choi 2011·07·02 5151 342
224  재난의 시작인가 진통의 시작인가? Disaster or Birth pain?     Y.J. Choi 2011·04·21 4096 360
223  카니발(Carnival)과 사순절(Lent)     Y.J. Choi 2011·03·17 9845 445
222  파두(FADO)     Y.J. Choi 2011·03·03 6688 374
221  에피테제(Epithese)     Y.J. Choi 2011·02·03 7349 413

    목록보기   다음페이지 1 [2][3][4][5][6][7][8][9][10]..[16]   [다음 10개]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