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Korean Church of Brussels! 브뤼셀 한인교회

 
 
 
 















TOTAL ARTICLE : 608, TOTAL PAGE : 1 / 41
구분 주일 예배 | 수요 예배 | 초청 설교 | 특별 예배 |
주일 예배 : 2015.06.28 / 자유를 위한 부르심 (갈 5:1. 13-15) / 김동민 목사
 DMKim  | 2015·06·28 14:51 | HIT : 1,123 | VOTE : 100
주 안에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요? 자유라는 개념이 추상적이고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여 말하려 합니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방종은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는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 별 차이 없어 보입니다. 철학자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 자유의 법칙이다”.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나는 방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엄청 자유에 침해를 받고 엄청 스트레스 받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나는 내 자녀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우리 아이에게 학교 규정으로 스트레스 주지 말고 자유롭게 놔두라고 부탁합니다. 그런 부모의 부탁이 선생님에게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는가 부모는 모릅니다. 나는 내 자녀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 밥 먹을 때, 제자리에서 먹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먹게 합니다. 남의 집에 가서도 돌아다닙니다. 음식을 이리 저리 흘립니다. 놀고 싶으면 놀고 밥 먹고 싶으면 다시 식탁으로 와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면 그 집 주인이 스트레스 엄청 받죠.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서 자유의 문제는 보다 심각합니다. 표현의 자유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익명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런식으로 놔두니까 무슨 일이 발생합니까? 연예인들이 익명의 악성 댓글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한 쪽에서는 자유라고 외치는 순간, 다른 쪽에서는 고통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도대체 자유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살피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지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얽매는 그 ‘무엇’에 대해서 우리는 그 실체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지를 알았다면, 이제 우리가 받은 자유를 어떻게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배우려고 합니다.
첫째, 바울이 말하는 자유란 무엇일까요?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일까요?
바울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유를 얻게 되었는지 바울은 갈 5:1에서 잘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가 이전에 무언가를 섬기면서 종이 되었었다고 합니다. 그런 종노릇하는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이죠. 어디일까요? 바로 죄의 종노릇했고, 사탄의 종노릇했습니다.
그런 종노릇하는데서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신 것이죠. 예수께서 우리를 종된 것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서는 충족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기에 마땅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죠.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속물이 필요합니다. 공짜로는 우리를 풀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치르신 값은 바로 자신의 목숨이었죠.
우리가 받은 자유는 그렇게 얻어진 것입니다.
죄의 종, 종의 멍에… 이런 단어들은 생소합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바로 ‘이기심’입니다. 자기 정욕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맘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태도와 의지를 말합니다. 낙원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만 의지하고, 자기 안에서 구원을 찾고, 몸부림 치는 것이죠.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을 내 바깥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 안에서 구원을 발견할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죠. 이것은 기독교와 타종교의 결정적인 차이점 중 하나입니다. 구원을 내 안에서 찾느냐, 아니면 내 바깥에서 찾느냐…
5월 24일에 석가탄신일이었습니다. 그때 법륜 스님이 즉문즉답하는 방송을 봤습니다. 청중석에서 어떤 여자가 일어서서 질문합니다.
“스님, 우리 부모님이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극락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때 법륜 스님이 이렇게 답합니다.
“질문 하신 분 나를 따라 하세요”.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 여인이 자기도 웃으면서 일단은 스님의 말을 따라합니다. 스님이 말합니다. “이제 답변이 됐지요? 다음 분…” 그 때 여인이 당황하며 다시 질문합니다.
“스님, 그것은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신부님들이 하는 말씀 아닌가요” 그때 스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마음으로 부모님이 극락에 갔다고 믿으면, 그 분들은 극락에 간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마음으로 믿지 않고 의심하면 네 부모님은 지옥에 갔다”.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고 긍정하는 네 자신의 마음을 신뢰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죠? 절대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네가 곧 신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이죠. 즉, 세상에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를 얽어매는 정염을 버리고, 모든 욕심을 버리고, 결국 내가 신이 되고, 내 안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 그가 진정한 불자가 되는 것이죠.
굉장한 논리입니다. 네 자신을 믿고, 자신이 하는 바를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이 세상 종교의 핵심이죠. 섬기는 신은 달라도, 섬기는 방식은 달라도, 결국 자기 안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별 차이 없는 것 같지만, 이것이 세계관의 차이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을 내가 노력해서 내 안에서 찾고, 그래서 내가 신이 되느냐, 아니면 나는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을 내 바깥에서 찾느냐…
저희 교회 기초반 성경공부 하면서, 그리고 세례교육하면서 저는 이 점을 늘 살핍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은사가 있고, 어떤 역량이 있는지 보다도, 과연 그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가?
베드로가 이런 값진 고백을 했죠. 마 16:16-17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은 자기 안에 모든 가능성을 부인하는 고백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 이것은 우리가 세례 받을 때 확정됩니다. 갈 2:20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 여기에 이미 성령의 사역이 들어가 있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내가 아니요, 마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고, 그 성전의 머리는 예수님, 우리는 살아있는 돌들이죠. 그 거룩한 성전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말합니다. 갈 5:13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렇게 얻은 자유인데, 다시 그 자유를 가지고서 육체의 기회를 삼으려고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서 이 육체의 기회를 엿보려고 하는 데서 완전히 자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시 옛 사람, 낙원에서 범죄한 아담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유혹…  바울은 이런 성향을 육체의 일로 규정하고서 육체의 일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나열합니다. 갈 5:19-21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특별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자기 정욕 때문에 합법적인 결혼 바깥에서 취하는 태도이죠. 그리고 29절에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이 나옵니다.
나를 드러내고, 내 욕심을 어떻게든 표출하려는 유혹. 내가 받은 상처를 어떻게든 갚아서 복수하려고 하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이간질 해서 내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공동체가 나누어지고 분열됩니다. 자기 욕심이 강한 사람들이 많은 곳, 바울은 경고합니다. 갈 5:15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물고 먹는 것… 이것은 짐승들이 하는 짓이죠. 자기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상대를 물고 갈기갈기 찢는 짓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 짐승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죠. 바울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바로 이기심이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목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육체의 기회를 삼으려고 하는 사람이죠. 바로 끊임 없이 자기 욕심을 죽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드러내려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갈 5:13에서 권면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죄에 종노릇 하던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사랑 안에서 남을 섬기고 종이 되어라는 것이죠. 14절에서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일을 공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목자/목녀 임명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게 되는 김정희 형제… 근 1년 동안 저와 교제를 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하는 모습이 귀했습니다. 제법 성과도 잘 이루어내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근데 모든 예수 믿기 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자아가 강해서 과연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기회가 왔다 싶으면 밀어붙이고, 때로는 뒤로 물러났습니다. 무슨 연애할 때처럼 밀당을 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안 좋은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고, 처음에는 목사나 교회에 대한 신뢰로 별로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 형제가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 칼들이 무뎌지지 않게 하면서 다만 그 칼들이 남들을 겨냥하기 보다,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볼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주신 자유를 가지고 남을 섬기는데 사용하기로 결단하는 한 청년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힘, 자신의 자유의지로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세례교육을 하면서 철저하게 저의 무능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모시는 결단, 그것은 하나님이 하셔야만 한다… 매 순간 깨달았습니다.

주 안에서 성도 여러분!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에 대해 답해 봅시다. 자유란 무엇이죠? 내가 하고 싶은 말, 내 속에 있는 쓴뿌리를 다 드러내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내 이익을 위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기심, 아상 (我相) 을 버리고 사랑 가운데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남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자유인 것이죠.

오늘 세례를 통해 주님이 당신의 피 값을 통해 참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는 이 형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고백하는 이 형제가 사랑 가운데 종노릇하는 자로 자라갈 수 있도록 늘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미 당신이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고 사랑으로 넉넉히 섬긴 두 성도를 리더로 받아주시고 섬기며 존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브뤼셀 한인 교회가 당신의 피 값으로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멘
KCB  받은 은혜를 댓글로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댓글과 조회가 많은 설교는 게시판에 오랫동안 보존하려고 합니다.
  
  2015.09.06 / 공의로 재판하라 (출 18:13-27) / 김동민 목사 1190
  2015.06.14 /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고후 10:1-11) / 김동민 목사 1018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GGAMBO